[김덕진출판사], 삶을 우려낸 시 한 잔

[김덕진출판사], 삶을 우려낸 시 한 잔
[김덕진출판사], 삶을 우려낸 시 한 잔

서정의 귀환, 찻잎 위의 시 – 김덕진 시집이 던지는 삶의 속도에 대한 질문

“녹차밭에 비가 내리면 나는 찻잔이 된다.” 김덕진 시인이 자신의 첫 시집 제목으로 꺼내 든 이 문장은 곧 그가 살아온 삶의 밀도와 감성의 언어다. 수원에서 34년을 교직에 헌신해온 그는, 퇴직 후 시인으로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이제 시작된 것’보다 ‘잊었지만 오래된 감정’들이 더 진하게 스며 있다. 이 시집은 다시 삶을 바라보는 눈—낡고 조용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시선으로 가득하다.

찻잔이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들

김 시인은 1996년 처음 수필가로 등단했고, 2022년에는 정식으로 시단에 이름을 올렸다. 첫 시집 ‘녹차밭에 비가 내리면 나는 찻잔이 된다’는 그러니, 단순한 데뷔작이 아니라 삶이라는 오랜 숙성의 결과물이다. 그는 교육자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았고, 이제 시인의 감각으로 그 풀어낸 삶의 단면들을 다시 천천히 씹는다.

찻잎은 뜨거운 물을 만나야만 향을 낸다. 시인은 삶의 뜨거운 장면들—은퇴의 불안, 일상의 반복, 관계의 고요한 변화들—을 서정적 언어로 증류한다. 손근호 평론가의 말처럼, 그의 시는 감정을 철학화하는 문법을 통해, 독자가 지나쳐온 자신의 시간들을 다시 더듬게 만든다.

교단과 시의 이음새, 인간을 가르친 사람이 전하는 감정 수업

교단은 늘 설명하고 가르쳐야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시는 설명을 내려놓고 느끼게 하는 매체다. 김덕진 시인의 시가 특별한 이유는, 오래도록 타인을 배려해온 삶 이후에 비로소 자기 감정을 허락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구체적인 자전적 묘사가 드물지만, 오히려 그 보편성이 그의 삶을 거쳐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비 젖은 녹차 나무 위에 / 가만히 엎드리니”라는 문장처럼, 그는 독자에게 감각의 낙타처럼 천천히 눕는 자세를 요청한다. 이른바 ‘화려한 시어’나 실험적 도발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의 시가 누군가의 저녁을 적시는 따뜻함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한국 서정시에 대한 기대를 열어준다.

MZ세대, 이 느린 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흥미로운 건, 이 담담한 시집이 교보문고 시에세이 부문 주간 베스트셀러 104위에 오르는 반응이다. MZ세대를 포함한 젊은 독자층이 속도와 이미지, 스토리텔링에 민감한 시대에 왜 이 느리고 담백한 시에 귀 기울이는가. 어쩌면 그들은 디지털의 생성형 감정에서 소거된 ‘실감’과 ‘결’의 회복을 이 시집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통적인 서정을 다시 발견하는 이들은, 찻잎을 우리는 과정의 정적을 자신의 삶으로 번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 오는 녹차밭’이라는 풍경이 가진 미래적 감정

시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단 하나, ‘당신의 감정은 아직 살아 있는가’다. 김덕진 시인의 시는 거창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저 잔잔한 비 내리는 녹차밭이라는 풍경 속에 독자를 데려와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의 감정도 언젠가 눈을 뜰 수 있다고.

이 시집은 기억의 연습이 필요하고, 감정이 버려지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한 이들에게 더없이 따뜻한 문턱이다. 김 시인이 지나온 교단과 삶처럼, 독자도 삶의 어느 막차 시간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한 권의 시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지금 우리가 감각해야 할 문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천천히’ 사유하고, ‘고요히’ 감정을 길어올리는 일입니다. 이 시집을 읽으며 여러분은 어떤 순간에 찻잔이 되었던가요? 또는, 어떤 감정을 우리는 그대로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 저녁, 한 잔의 녹차와 함께 잠시 눈을 감고 ‘비 내리는 듯한 감정 하나’를 혼자 우려내 보세요. 어쩌면 그 찻잔 속에서 오래된 당신의 이야기 하나가 고요히 웃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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