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학대 예방은 누구의 책임인가 – 제도, 인식, 지역사회의 역할을 새롭게 묻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노인의 삶'은 한국 사회의 중심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생애 후반의 삶이 존엄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노인에 대한 구조적, 정서적, 물리적 학대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하기 때문이다. 2025년 6월, 전라남도에서 진행된 '제9회 노인학대 예방의 날 기념식'은 이러한 현실에 문제의식을 던지며, 노인 인권 보호를 지역사회 공통의 과제로 환기했다. 이 행사를 계기로, 제도적 한계, 사회 인식, 지역 차원의 대응, 그리고 우리가 내딛을 수 있는 다음 걸음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정 기념일이 된 '노인학대 예방의 날', 그 제도적 의미는
'노인학대 예방의 날'은 2006년 UN과 세계노인학대방지망(INPEA)이 지정한 국제 기념일로, 한국에서는 2017년부터 법정기념일로 운영되고 있다. 법적 근거는 「노인복지법」에 있으며, 그간의 제도적 발전으로 전국에 '노인보호전문기관'이 설치되고, 신고 의무화 범위도 확장되어 왔다.
제도 마련 이후 학대 신고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노인학대 신고는 총 17,000건이 넘었으며, 이 중 실제 학대 사례로 접수된 것은 약 6,000건이다. 학대의 대부분은 가정 내에서 발생하며, 가해자의 절반 이상이 자녀라는 점은 복지 시스템의 가족 의존적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러한 수치는 학대가 증가했다기보다 인식과 신고가 증가했다는 긍정적 신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신고율이 낮고, 은폐되기 쉬운 구조 속에서 제도적 한계도 계속 노출되고 있다. 특히 지역별 편차나 노인보호기관의 자원 부족 등이 학대를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다.
조용한 폭력, 일상 속 학대를 마주하는 방식
전남 목포에서 열린 기념식은 단순한 행사를 넘어, 문화적으로 학대 예방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도들이 돋보였다. 미디어아트와 연극, 영화제, 사진전은 제도 언어보다 훨씬 더 감각적으로 시민들에게 노인의 권리와 인간 존엄성에 접근했다. 이는 예방 중심 정책이 단지 '신고'와 '조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인식 개선과 공감 기반 접근법으로 확장돼야 함을 시사한다.
특히 연극 공연에 참여한 시니어 배우들은 ‘존엄케어’의 메시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노인을 ‘돌봄의 대상’이나 ‘부양의 부담’이 아니라주체적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학대는 폭력만이 아니라, 존엄의 부정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서적 방임이나 무관심이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세대 간 시선의 차이, 돌봄 책임을 둘러싼 갈등
노인학대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논의는 ‘돌봄 책임’의 분산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가족 중심의 부양 의무에 기반한 제도를 운영해왔다. 하지만 가족 해체, 1인 가구 증가, 청년 세대의 경제적 불안정은 ‘부양의 여력’ 자체를 약화시키고 있다.
한편 노인 세대는 여전히 자녀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자녀는 이 책임을 짐으로 받아들이며 갈등이 격화되기도 한다. 이런 세대 간 인식 차이 속에서 노인학대는 때로는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발생하며, 예방을 위해 가족만이 아닌 '사회 전체의 책임' 분담이 절실하다.
해외의 대응 방식, 무엇을 참고할 수 있을까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은 돌봄의 공공화를 적극 추진해왔다. 특히 스웨덴은 ‘노인 돌봄은 국가의 몫’이라는 원칙 아래, 지역사회의 지속 돌봄 네트워크를 촘촘히 구축했다. 이는 노인학대를 가족 내부 문제로 한정짓기보다는 사회 인프라의 문제로 확장해 해결의 범주를 넓힌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한국 또한 최근 '커뮤니티 케어' 정책이나 '노인맞춤돌봄서비스' 확대 등의 방안을 지속 추진하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현장 인력 부족, 재정 취약, 계약직 위주의 돌봄 노동 내취약성 등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생애 말기의 존엄을 위한 첫걸음
노인학대는 단순히 특정 계층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어떤 '노년'을 상상하고 준비해왔는지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제도와 인식이 따라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 돌봄의 공공화, 예방 중심의 정책 설계, 그리고 의식 전환이다.
이제는 시민 한 사람, 지역사회, 기관, 정책 담당자 모두가 생애 말기의 삶이 존엄할 권리에 대해 질문을 품고, 그로부터 실천을 시작해야 할 때다. 우리 각자의 삶의 끝자락이 어떤 환경에서 마주하게 될지를 상상하는 것은 단지 공공부문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OK, NOW 함께 예방’이란 메시지는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외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