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학대 예방의 날이 던지는 질문 – 인식의 변화와 정책의 실효성 사이
한국 사회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적 수준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18.4%에 도달했고, 2025년이면 인구 다섯 명 중 하나가 노년층이 된다. 그러나 고령사회로의 이행 속도에 비해, 사회적 인식과 인권 보호 체계는 여전히 완비되지 못한 상태다. ‘노인학대 예방의 날’이 열리는 배경 속에는 단순한 기념 행사를 넘어, 구조적 문제를 마주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감춰져 있다.
전라남도에서 개최된 제9회 노인학대 예방의 날 행사는 지역사회 중심의 대응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노인학대 문제를 공공의 과제로 인식하고 미디어아트, 연극, 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적 장치를 활용한 시도는 분절된 정책에서 벗어나 시민 감수성을 울리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로도 읽힌다. 하지만 이를 제도로 얼마나 수렴해낼 수 있는가는 여전히 남겨진 과제다.
공적 통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은폐된 학대'
보건복지부의 ‘2022년 노인학대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접수된 노인학대 신고 건수는 약 20,500건에 달했다. 이 중 실제 학대로 판정된 건수는 5,860여 건.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가장 많은 학대가 가족 안에서 벌어지고, 피해자는 신체적·정신적, 그리고 정서적 의존도가 높아 신고조차 어려운 상황이라 지적한다. 특히 치매나 거동 불편 등 보호가 필요한 상황에서 ‘돌봄’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통제와 방임이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통계로 파악되지 않는 학대는 암묵적 방관 속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단지 개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 시스템이 재정, 인력, 정보 측면에서 얼마나 잘 정비돼 있는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고립과 돌봄 공백이 만들어낸 ‘신종 학대환경’
1인가구의 증가와 가족구조의 변화는 노인 복지에 실질적인 돌봄 위험 요인을 낳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독거노인 수는 약 159만 명으로 전체 노인 인구의 22.6%에 육박하며, 이 중 절반 가까이(47.7%)가 고립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사회적 고립은 학대를 방지하는 감시망이 약화된다는 점에서 쌍곡선처럼 문제를 증폭시킨다. 지역사회 기반의 노인보호전문기관이 있지만 법적 신고 가능성이나 접근성에서 한계를 보인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어떤 노인도 ‘이 체계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실질적 질문이 남는다.
인권의 언어가 닿지 않는 공간, 요양시설
또 다른 학대의 온상은 일부 요양시설이다. 시설 종사자의 3교대 노동환경, 낮은 임금, 부족한 인력은 돌봄의 질 저하로 직결되고, 때로는 신체적 억제, 언어폭력 등으로 이어진다. 「노인복지법」 개정으로 감시 장치와 신고의무가 강화됐지만, 시설 내부의 폐쇄성과 민간 위탁 구조 사이에서 실행력은 제한적이다.
이와 달리 북유럽 국가들처럼 공공이 재정과 인력을 직접 투여해 ‘겨울철 따뜻한 도시’를 만든다는 접근은 한국에서 여전히 요원하다. 민간에 의존하는 복지 시스템은 영리화와 인권보호 간 지속적인 충돌을 낳는다.
캠페인에서 제도로, 지역에서 일상으로
이번 전남 행사에서 보여준 것처럼 문화예술을 통한 접근은 감정적 자각을 이끄는 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여기에 멈출 수 없다. 예방과 조기 개입의 범위를 넓히려면 ▲노인학대 전담 공무원 확대 ▲지방정부 중심의 돌봄 네트워크 강화 ▲피해노인을 위한 쉼터 및 탈출 경로 다변화 조치 등이 병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노인의 권리를 ‘존엄’이라는 언어로만 이야기하지 않고, 생활 현장에서의 보장 장치로 전환시키는 법적·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노년을 꿈꾸는가?
노인학대 문제는 단지 노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나이 들어가는 삶을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자, 모든 세대가 미래를 맞이할 준비성에 대한 점검이기도 하다.
조용히 독거하는 이웃 노인의 안부를 묻고, 요양시설의 인권 실태에 관심을 가지며, 시민 감시자로서 지역의 복지 예산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이 작은 행동들이야말로 제도가 막을 수 없는 사각을 메우는 사회적 연대다. 제도와 시민, 공조와 관심 사이의 균형이 바로 건강한 노년사회로 가는 첫걸음이다.